408.죽음

스크린샷 2021-02-25 오후 9.40.52.png

<동영상 링크>

스크린샷 2021-02-25 오후 9.41.02.png

<동영상 링크>








 읽기자료   살면서 죽음을 기억하라 – 레프 톨스토이



타오르는 촛불이 초를 녹이듯


우리 영혼의 삶은 육체를 쓰러지게 한다.


육체가 영혼의 불꽃에


완전히 타버리면 죽음이 찾아온다.




삶이 선하다면 죽음 역시 선하다.


죽음이 없다면 삶도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와 세상, 우리와 시간 사이의


연결을 끊어놓는다.


죽음 앞에서


미래에 대한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조만간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찾아오리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잠잘 준비, 겨울 날 준비는 하면서


죽을 준비를 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올바로 살지 못하며


삶의 법을 깨뜨린 사람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살면서 죽음을 기억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삶은 진지하고 즐거우리라.








 읽기자료   소크라테스적 성찰 – 도서


서양 철학에서는 죽음에 대한 탐구가 매우 심층적이며 광범위하다. 소크라테스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죽음에 대해 깊은 식견을 피력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크라테스의 죽음관과 죽음에 임하는 태도는 그것이 전형적으로 ‘철학적’이라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며 깊은 감동을 준다. 그는 말하자면 철학적으로 ‘바람직한 죽음’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에서 인정하는 신을 믿지 않으며, 따로 새로운 신령을 만들어 믿고 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섰다. 그는 ‘변명’의 기회를 얻은 법정에서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가 없으면서도 마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남기고 결국 독배를 마신다. 그는 전형적으로 불가지론적 태도를 보이며 죽음에 임한 것이다.

죽음을 택하기 전에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의 배려로 사실 탈옥의 기회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자율적이고 합리적이며 도덕적인 맥락에서 깊은 자기 성찰에 몰입한 다음 마침내 친구의 권유를 뿌리친다. 탈옥하면 동포들을 배반하고 준법의 약속을 어기며 그토록 사랑하는 조국을 능멸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후 당국에서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면을 제의했으나 그는 그 제안마저도 거절했다. 자기가 살아온 방식대로 살 수 없다면, 다시 말해서 철학자가 철학을 할 수 없다면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의미 있다고 믿는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자기가 살아온 방식대로 죽는 것이, 다시 말해서 주체적으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한 죽음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얼마나’ 사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였고, 그러므로 자기가 ‘바람직한 삶’이라고 판단한 삶을 사는 것이 여의치 않을 때 히포크라테스의 관심사인 건강이나 생명의 연장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없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토스Epictetus에 따르면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사건들이 아니라 사건들에 관한 그들의 판단”이다. 죽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교설』에서 “죽음이란 전혀 두려운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것은 마치 소크라테스가 생각했던 것과도 같은 것”이라고 지적하며 “참으로 죽음에 관해 두려운 것이 있다면 죽음이 두렵다고 하는 인간의 생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적 죽음에 대한 스토아학파의 자연론적 해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소크라테스적 죽음관에 대한 일면을 잘 조명해준다.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내세의 존재와 상관없이 이른바 ‘교육’으로 인간은 죽음에서 자유로워지고 ‘부동심’에 이를 수 있는데, 이러한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죽음은 희열이나 환희가 아닌 것처럼 고통이나 공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만 욕구와 능력과 의무가 일치한 삶의 완성을 의미할 따름이다.

한편
니체는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죽음을 삶의 완성이라는 시각에서 조명한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전통적인 그리스의 본능적 가치를 해체하고 새로운 ‘학문’의 이념을 창조했으며 바로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었던 최초의 인물’로 평가한다. 니체는 그를 플라톤과 함께 그리스의 ‘본능’을 파괴하고 ‘이성’으로 대체했다고 비판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관만은 높이 평가한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인식과 그 근거를 통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그러한 인간이다. 나아가 그는 학문의 전당 현판 위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를 이해할 수 있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정당화된 학문의 사명을 상기시키는 방패의 휘장이다.

이와 같이 니체는 소크라테스처럼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한낱 생리적 사실인 것을 도덕적 필연성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터득하고 삶의 과제에 충실함으로써 그것을 축제로까지 드높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한편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죽음에 임해서도 소크라테스처럼 실존적 자세를 유지할 것을 주문한다. 무엇보다 그는 인간이 단순히 한 잎의 낙엽이 아니라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 견지했던 존재 이유와 역사적 사명과 사회적 역할 등이 언제인가는 결말을 고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러한 의미로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며,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한 죽음이 구체적으로 삶에 개입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죽음을 대신 떠맡을 수는 없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을 수는 있다. 그러나 누가 자기를 위해서 죽는다고 해서 자신의 죽음이 결정적으로 제거되었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각기 항상 자기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떠맡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므로 우리는 자신의 정신력과 인격 전체를 걸고 결단을 내려야 하며, 이른바 ‘죽음에로의 선구Vorlaufen zum Tode’라는 실존적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순간 우리는 불안이라는 기분에 사로잡히기 마련인데, 그것을 피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불안을 통해서 보통 사람들의 세계를 초월해야 한다.

아름다운 죽음의 비결

죽음을 피하거나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도 죽음을 면할 길은 없다.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극복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영생을 얻는 방법이 있다고 믿으면 무지하면서도 자신을 기만하거나 설득하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 죽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적인 인식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숙연한 마음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죽음에는 의지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이 있다. 죽음에 임하는 마음의 자세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을 공포로 느낄 수도 있고, 환희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른바 ‘교육’이 완성된 부동심의 철학자에게 죽음은 환희가 아닌 것처럼 공포의 대상일수도 없다. 그것은 그저 섭리에 따라 ‘탄생’처럼 조용히 다가올 뿐이다. 탄생 이전의 상태에 대해서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처럼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바람직한 삶을 살아왔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그것은 평온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또 하나의 경험일 뿐이다.

특히 소크라테스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한 죽음’은 육체적으로 편안하게 죽는 것보다 정신적으로 의미 있게 죽는 측면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여기서 죽음에 의미가 있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완성과 연관된 의미다. 죽음에 임박해서 자기가 살아오는 동안 원하는 것을 해낼 수 있었고, 그것이 또한 의무이기도 한 것이어서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면 그는 자신의 삶을 완성한 셈이며, 그러한 맥락에서 그의 죽음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러한 의미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죽음을 매개로 해서 그 삶을 다시 음미해볼 수 있다면 이것이 곧 죽음이 지닌 또 하나의 의미다. 그 어떠한 경우이든 소크라테스적 자아의 인식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과학기술이 어느 정도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지만, 무엇을 원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지 않으며 오히려 욕구를 더욱 확장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경우에
철학은 니체처럼 인간으로서 초인 혹은 ‘달인’이 되고자 노력해 자아라는 삼각형을 조화롭게 극대화할 것을 권고하며, 하이데거처럼 죽음에 대한 불안을 역이용해 진정한 존재자로서 ‘달관’할 것을 설파하기도 한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적으로 바람직한 삶으로부터 죽어가는 방식이며, 바람직한 죽음을 살아내는 한 형태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아궁이에서 치열하게 불길을 내뿜다가 한 줌의 재로 남을 때까지 전소하는 하나의 장작개비에 비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장작개비가 하나의 장작개비로서 가장 바람직하게 존재하는 방식이며 동시에 가장 아름답게 소멸하는 모습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로 아름다운 죽음의 비결은 바람직한 삶 속에 숨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철학 탐구활동 과제>

☞ 영화 감상 후 QR코드 링크로 영화-철학 심화탐구활동 과제를 제출하세요.

☞ 아래의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으시오.

☞ [질문] ‘죽음’을 바라보는 나의 생각, 태도는 어떤가요?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

☞ 과제 제출 링크  https://forms.gle/tCvSkbAWTUmfw7HaA

스크린샷 2021-02-25 오후 9.41.17.png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