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자료4. 철학의 열 가지 큰 물음 <천재A반을 위한 Philosophy 톰 모리스>

읽기자료4. 철학의 열 가지 큰 물음 <천재A반을 위한 Philosophy 톰 모리스>


 


1. 철학은 쓸모가 있을까?


 


철학자들은 우리가 절대 풀 수 없는 문제들을 가지고 끝없이 논쟁하는 듯 보입니다. 저는 푸른 색 차가 밖에 있다고 하는데 여러분께서 그런 차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면 우리는 보러 나갈 수 있습니다. 저는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여러분께서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확인할 길이 쉽지 않지요. 적어도 제게는 당장 취해야 할 할 방도가 없습니다. 철학자들은 괜히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우리가 알수 없는 것들을 자아내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가장 쓸모 없는 존재가 철학자들 아닐까요?


 


어떤 것이 실용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목표에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 이 세상에서 삶이 무엇인지 ,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을 포함한다면 철학은 굉장히 쓸모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여러분의 목표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글쎄요, 여러분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필요합니다.


 


철학자들이 궁극적인 문제들에 관해 끝없이 논쟁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런 논쟁에 해답이 없거나 그 해답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재정 계획과 투자 전략에 관해 끊없이 논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투자는 어떤 때든 나쁜 투자를 이기기 마련입니다. 정치가들은 다스리는 문제들에 관해 끝없이 논쟁합니다. 어떤 정책들은 여전히 다른 정책들보다 더 낫습니다. 삶에서 엄격한 증명이 쓸모 없는 곳에서도 지혜는 있습니다. 그리고 철학자들이 그런 지혜를 찾습니다.


 


2. 우리는 어떤 것을 진정으로 알 수 있는 것일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어요. 죽음에서 살아남는가, 그렇지 않는가? 여러분께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안다고 생각하시거나 모른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이 있거나 없거나 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어떤 것을 알 수 있다고 논리적으로 증명하기에 충분합니다. 이런 식으로 둘 중 하나가 진실이라고 아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런 앎은 분명 여러분이 삶을 설계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시시한 논리적인 것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증거의 범위 너머의 것(그 자체로 알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의 일들에 관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접받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시간은 지극히 제한된 상품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쁜 것이 무엇인지 고통스러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철학은 우리 모두가 안다고 깨닫고 있는 평범한 것들을 가지고 구축하려는 시도이며, 일상의 광란의 질주 속에서 보통은 숙고해보지 않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비범한 결론에 이르려는 시도입니다.


 


지식은 보편적인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의해야만 하는 것은 더욱이 아닙니다. 때로는 여러분과 제가 보편적으로 인식되지 않은 진리를 은밀히 공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에 대해 선견지명과 통찰이 부족하더라도 여러분 자신의 수단으로 진정한 지식을 얻을 능력은 결코 훼손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반대하면 그는 화가 아니라 내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반대하고, 나를 가르치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 진실의 원인은 두 가지에 대한 공통의 원인이어야 한다. -몽테뉴


 


사실, 우리 자신과 타인들 사이에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를 좀더 지식으로 나아가게 자극하는 것입니다. 열린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는 배울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식은 늘게 됩니다.


 


회의주의는 폭넓은 범위로 올바르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넓은 범위로 부정하는 것이 옳은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지식은 수용성의 하나로 삶의 근본적인 힘입니다.


 


3. 윤리에 절대적인 객관성이 있을까?


 


사람들은 각자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분명 때때로 윤리적 판단에 불일치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알려진 문제에 관해 객관적인 진실이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윤리의 실제들에는 우리가 올바른 끼우는 한 보여지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전 삶은 놀랄 정도로 도덕적이다. -소로


 


인식론은 형이상학을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부분들만 인용하셔도 좋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최후까지 결정하지 못한다고 동의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취하세요. 앎의 문제들은 우리가 알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에 논리적으로 실제가 없다는 의미는 없습니다. 물리학자들은 불일치합니다. 경제학자들도 불일치합니다. 하지만 때로 알기 어렵다 하더라도 물질적 우주에 객관적인 것은 있습니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의 범주에 포착이 되어 있건 그렇지 않든 경제적 실제들을 수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윤리의 진실도 똑같습니다. 안다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은 때로 다릅니다. 모든 문화권을 통틀어 가장 실용적인 차원의 윤리적 사고를 살펴 볼 때 여러분은 모든 표면적인 차이 아래 있는 놀라운 일치를 발견할 것입니다. 인간 본성에 관해 본편적 진실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윤리적 진실인지 우리가 결코 확신할 수 없는 영역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관습과 동의를 통하여 이식시켜야 하는 윤리적 영역들, 우리 인가느이 손길에서 분리되어 결정적이고 두드러진 풍경이 없는 영역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윤리와 도덕의 실제들은 일찍이 우리가 법을 제정하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도덕의 위대한 비밀은 사랑이다. -셸리


 


4. 나는 누구인가?


 


누군지 알고 싶나요? 농담입니다.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이 질문은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대답이며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어려운 물음입니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여러분께서는 자기 인식이 꽤 쉬울 거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탐구하는 질문에 언제나 즉각적으로 접근하니까요. 하지만 그 모양들은 종종 실제와는 다릅니다. 결국 자기 인식은 삶에서 가장 심오하며 어려운 질문 가운데 하나가 되기 마련이지요.


 


우리는 타인에게서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으며 성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 자신을 발견하고 창조하는 과정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도덕의 객관성, 자유의 실제, 마음의 존재, 죽음과 죽음 뒤의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 신, 삶의 의미, 이런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여러분이 누구인지와 깊은 부분까지 관련 있습니다. 하지만 정체성에 대한 물음의 다른 부분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일상생활의 성공에 대한 실질적인 문제들과 직면할 때만 끄집어냅니다.


 


여러분의 재능은 무엇인가요? 여러분의 가치는 무엇인가요? 여러분이 정말로 가장 절실하게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삶에서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떠나며 남기고 싶은 유산은 무엇입니까?


 


이것들은 자기 인식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모두 삶의 초기에 대답하기 힘든 물음들이지요. 우리는 살아가며 여러 가지 가능한 길들을 실험하면서 이런 질문들을 이해하고 그 대답들을 통찰하는 가운데 성장합니다. 삶은 자기 인식과 자기 창조라는 일련의 모험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외적 세계를 탐사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내적 세계에 관해 좀더 배우고 형성해 갑니다.


 


자신을 알려면 자기를 내세워야 한다. -알베르 까뮈


 


‘나는 누구인가?’ 대답해야할 질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살아가면서 쓰여지는 질문입니다. 이 물음은 언제나 또 다른 질문 ‘나는 무엇이 되고 있는가?’와 관계되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각자 주어진 재능과 기회를 가지고 하는 일에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세상에 긍정적인 차이를 만들고, 우리가 누구인지 표현하는 일을 할 기회를 가집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우리는 삶에서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찾을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조언에서 이익을 얻어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지혜를 개발하여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오로지 그 과정만이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한 물음에 궁극적으로 대답할 수 있게 합니다.


 


5. 이 세상에서 행복은 진정 가능할까?


 


그렇구 말구요.행복은 때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상황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능합니다. 행복은 결코 자기 도취나 환희의 들뜸과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행복은 정서적인 상태라기 보다는 존재의 완전한 상태입니다. 악은 행복을 만들기가 어력습니다. 고통은 행복을 바작 몰아넣어 안 놓치려 합니다. 때로는 너무 많은 것들이 우리를 이 세상에 인질로 붙잡아 두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할 자유를 결코 즐 수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배우자, 자식, 부모, 또는 친한 친구가 없으니까 여러분은 행복할 수 없다고 느끼곤 합니다. 어떻게 오늘 행복해질 수 있나? 내일 무슨 일이 닥칠지 알지도 못하는데, 그런데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어도 과거가 과거가 여러분을 짓눌러 꿈에 그리는 행복에서 거리가 멀어지게 하지요.


 


가장 통찰력 있는 철학자들은 우리가 정말 소유하는 유일한 순간은 현재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과거나 미래는 끔ㅎ임없이 우리엣게 소유권을 주장하지요. 이 세상에서 자유를 얻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우리가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하는 시간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과거에 매달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붙들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로 충만함으로 가득한 현2재의 순가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을 경험하는 바탕입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다른 선한 사람들과 가치 있는 대상을 향해 일하는 과정(여러분이 즐길 수 있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개인적인 행복의 상태로 가는 근본적인 비결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외로운 추구로서 얻어질 수 없습니다. 사거나 빌릴 수도 없습닌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선을 위한 차이를 만드는 사랑과 활동의 부산물로 창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용감하게 투쟁한다. 하지만 우리의 판단하는 기회와 능력으로 측정하면 행복할 듯도 싶다 – 아그네스 레플러


 


이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꽤 많습니다. 여러분이 때로 생활의 영역에서 약간만 바깥으로 옮겨간다면 그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한 사람을 발견하는 것 만으로 삶에 영감을 불어 넣어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일원이 되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삶에 영감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6. 선함 삶이란 무엇인가?


 


선한 삶이란 어린이들이 학교에 총을 가져가 친구들을 죽인는 것이 아니지요. 윤리적 배경이 다르다고 해서 사람들을 고문하고 대규모 집단을 몰살해버리는 삶도 아닙니다. 국가들 사이에 탐욕으로 투쟁하는 것도 아닙니다.


 


선한 생활이란 무엇보다도 재산, 권력, 사치, 지위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명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고삐가 풀리거나 지나친 자아도취에 빠진 존재도 아닙니다.


 


우리 의지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선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늘 보지 못한다. -장 자크 루소


 


선한 생활은 모든 인간의 지적, 미학적, 도덕적, 영적인 필요성을 존중하고 양육하는 태도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가족에서 시작하여 친구와 동료로 확대되고 마침내 인공적, 자연적 경계를 너머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까지 미칩니다.


 


선한 생활에는 자유, 사랑, 일, 기쁨, 도전, 우정, 공동체, 봉사, 창조적으로 스일 수 있는 자원 등이 포함됩니다.


 


조그만 마을에서 비천한 환경 그 자체가 선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맨해튼의 동쪽 슬럼가 그 자체가 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막는 것도 아닙니다. 선한 삶에 대한 가장 큰 장애물은 외적인 것이 전혀 아닙니다. 고대 철학자들로부터 규정되고 이해해온 내적인 악 때문입니다. 시기, 원한, 빈정거림, 악의, 허위, 편견 등이 선한 생활의 적이며 선한 존재로 살아가는데 장애물이 됩니다.


 


치고의 삶은 의미 있고, 창조적이며, 기회와 배움과 웃음을 가져오는 열린 모험이며, 다른 사람의 삶에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그것은 가장 깊은 실제와 연결되어 있고 가장 높은 가능성을 고무하는 삶입니다.


 


행복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찾는 사람들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의 진리와 똑같아 보인다. -버트란트 러셀


 


선한 생활은 각자의 특성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반적인 개요는 보편적입니다.


 


7. 왜 세상에는 고통이 그토록 많은 걸까?


 


너무 많은 고통이 있는 것은 너무 많은 감성이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성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생각할 뿐 아니라 느낍니다. 우리는 많은 차원에서 삶을 경험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깊게 살아갈 수 있지만 엄청나게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영리할수록 더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진정으로 현명해지는 거지요. 그래서 더 큰 통찰을 할 수 있고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묻지요. 왜 그토록 많은 고통이 있는 걸까요? 우리의 자유는 너무 강력해서 우리는 서로에게 엄청난 고통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요. 그것이 이 물음에 대해 부분적인 설명이 됩니다. 그것의 일부가 바로 내적인 악이며, 또 그저 어리석음일수도 있지요. 하지만 사악함과 무분별은 별도로 치더라도 고통은 우리 삶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언제나 왜냐고 물을 수만 없지요. 그리고 늘 우리를 둘러싼 고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좌절하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형적으로 반응하는 것보다 더 낫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제가 깨닫게 된 삶에 대한 매혹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테레사 수녀를 들 수 있습니다. 고통에 최고로 반응하는 사람은 최소한으로 좌절하고 혼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 자체가 철학을 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역경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힘을 알지 못한다. – 벤 존슨


 


8.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거든…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데 주변에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것은 소리가 난것일까요?”


 


‘바보는 현명한 사람이 보는 똑같은 나무를 보지 못한다.’ -윌리엄 블레이크


 


이 질문은 실제에 대한 하나의 관찰자 역할 또는 관찰자와 분리된 실제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일부 철학자들이 제1성질, 제2성질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질문으로 택할 수 있습니다. 제1성질은 물리적 덩어리처럼 하나의 사물 자체가 가지는 특성입니다. 제2성질은 관찰자와 관계되어서만 가지는 것입니다. 전 우주에서 눈으로 보는 시각만 있다면 색깔은 없는 것입니다. 빛의 파동이 있지만 색깔은 없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제1성질과 제2성질 사이에 확고하고 빠른 구별 짓기를 하는 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요구입니다. 나무 시나리오는 단지 여러분이 이 구별 짓기를 받아들여 제2성질로서의 소리를 생각하는 것을 알게 하는 실험적인 예입니다.


 


또 나무 질문은 기본적인 존재론(존재에 대한 대부분의 기본 이론)에 관해 직관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들과 필연적으로 독립적인 사물의 일종으로서의 소리가 있을까요? 그래서 들리지 않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든지 또는 객관적인 존재를 가질 수 있을까요?


 


철학자들이 이 같은 물음들을 던질 거라고 믿어지세요? 우리는 그렇게 대답 한답니다. 절친한 대학시절 철학 동료와 저는 자동차 범퍼의 크롬이 존재론적 위체에서 빛에 반사하는 것인지의 여부를 놓고 어느 맑은 날의 오후를 즐겼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철학자들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허구인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단지 실제에만 의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합니다.


 


버클리 주교는 모든 명백한 사물들은 단지 실제에 의존한다고 믿었습니다. 정신과 정신 속의 관념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그의 관념론에 따르면 관찰자 없이 떨어지는 나무의 소리는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나무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버클리에 따르면, 우리가 사물을 관찰하고 있지 않을 때도 신이 관찰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물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Ronald Knox는 버클리의 철학을 오행시로 옮긴 적이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말했다네,


“신이 이상히 여기셔야 하네,


뜰 안에 아무도 없는데


이 나무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보신다면.”


 


답장


친애하는 그대에게


당신의 놀라움이 이상하다오.


내가 항상 뜰 안에 거하며


보고있을 터이니,


그로 인해 나무가 존재하고


계속 서 있을 것이라네.


그대의 충실한 신으로부터


 


9. 버클리 주교는 말한다


 


-그저 눈을 뜨면 보일 정도로 마음에 매우 가까이 있는 명백한 진리들이 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존재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취한다. 이를테면 모든 천상의 성가대와 지상의 비치품, 즉 거대한 세계의 골격을 구성하는 모든 사물들은 마음이 없이는 어떠한 실체도 가질 수 없으며, 그것들의 존재는 지각되거나 알려지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사물은 내가 실질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나의 마음이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존재하지 않는한, 전혀 존재하지 않던가 또는 어떤 영원한 영혼의 마음에나 존재해야만 한다. 그것을 확신하기 위해 독자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감각적인 존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지각되는 존재와 분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 인간 지식의 원리에 관한 논고에서, 버클리


 


버클리의 말에서 우리를 이끄는 직관들을 유추하기 위해 세 가지 질문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소리는 듣는 자에게 의존하고, 색깔은 보는 자에게 의존하고 가능한 모든 감각들은 관찰자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숲 속에서 어떤 남자가 지껄이는데 주변에 그 말을 듣는 여자가 하나도 없다면,


그 남자는 잘못하고 있는 것일까?


– 여성들의 운영하는 시골의 핫도그 가판대의 메모


 


최근 과학은 우리들 대부분이 관찰자를 관찰하는 실제에서 분리하여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때를 겪어왔습니다. 현대 물리학에서 많은 발견이 이루어지며 측정의 문제로 잘 알려진 것 같은 발견들을 수용하기 위해 다듬어진 원리들에서, 우리 인간은 묘사하려고 하는 자연에 더욱더 깊이 관계합니다. 우리와 자연 사이에 구별짓는 선은 어디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한때 생각했던 대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무 질문에 대한 정답은 무엇일까요?


 


10. 합리성과 비합리성, 인간의 삶에서 어떤 것이 더 강할까?


 


컨테스트는 아닙니다. 비이성적인 힘은 이성적 사고보다 더 강해서 종종 우리에게 아주 비이성적인 일들을 하는 원인이 됩니다. 하지만 비이성적인 힘은 그 자체가 비합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가슴은 마음이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감정은 이성보다 더 강력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영역 안에서 논리적 지성보다 훨씬 강한 것은 상상력입니다.


 


그런데 말은 자신이 매고 있는 고삐보다 더 강할 수 있지요. 개는 자신이 차고 있는 사슬보다 훨씬 강할 수 있지요. 그럼에도 적절히 훈련된다면 말과 개는 고삐나 사슬로만 가능한 지침에 복종하여 이익을 볼 수 있스비다.


 


‘이성은 최후의 판단이 되어야 하며, 모든 것을 이끌어 준다. -존 로크


 


논리학은 우리에게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이성은 방향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에서 비이성적인 힘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동기나 영감을 불어 넣어주며 생산적인 에너를 가져다 줍니다. 하지만 이성에 의한 구속 없이도 우리 삶에서 위대한 선을 생산할 수 있는 비이성적인 힘은 끔찍한 비극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합리성이 우리의 길을 비춰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큰 지각으로 궁극의 목표를 파악해야 합니다.


 


이성 그 자체는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우리 사고가 실제와 간계를 가지도록 확신시키는 신앙의 행위이다. -체스터튼


 


 


 


 


생각하기- 글을 읽고서 인상깊은 구절을 적은 후 느낀점을 적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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