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잘하는 법-혹은 못하는 법

공부 잘하는 법 

-혹은 못해도 좋은 법 

권혁범 

대학 선생을 하다 보니까 주변 사람들이 ‘공부 잘하는 법’에 대해 내게 묻는 일이 종종 있다. 물론 중년 아줌마 아저씨 본인들이 갑자기 공부하려고 작심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자녀들 해당사항이다. 대학 못 가면 ‘가축’ 취급받고 명문대 못 들어가면 일생 기죽어 살아야 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라 그 심정 이해 간다. 요즘은 연애도 결혼도 대학 서열 맞추어 하는 세상이니 오죽 하겠나. 

그분들 말씀에 공통분모가 있다. 첫째, 우리 애 머리는 좋다. 둘째 그런데 공부는 죽으라고 안 다. 뭐, 내가 그분들이 자녀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게 크고 자식의 아이큐에 대해 자아 도취적 착각에 빠져있다고 비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 역시 항상 딸아이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사실 요즘 머리 나쁜 애는 드물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교는 ‘지방의 신흥 명문사립’으로 선전되고 있지만 (나도 되도록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편이다)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이 기를 쓰고 오고 싶어하는 대학은 아니다. (물론 한의대를 비롯 몇몇 인기학과는 예외다). 하지만 지난 세월동안 학생들을 가르쳐본 결과 우리학교 학생들 중에 머리가 좋은 학생들이 꽤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다른 대학 학생들과도 비교해서 뒤떨어지지 않는 학생들이 많다. 다만 수능에 좌절하면서 자신감을 좀 잃었을 뿐이다. 물론 대학생활을 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 4학년쯤 되면 도서관에 파묻혀 사는 책벌레들이 꽤 늘어나는 편이다. 

왜 머리 괜찮은데도 공부를 못할까? (물론 여기서 공부를 좁은 의미를 생각하지 말자. 세상의 모든 공부, 즉 음악 미술 운동 기술 등 여러 분야를 포함해서 하는 얘기다. ‘진보’ 지식인으로서 알려진 내가 입시정책 비판하지는 않고 ‘일류대’ 가라고 부추기는 글 쓰려는 건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유는 대충 다음 네 가지다. 1) 집중력이 떨어진다. 어떤 책을 집중해서 최소 한시간 이상 읽을 수 있는 인내심이 없다. 한 10분쯤 하고 나면 벌써 딴 생각하기 시작하고 30분이 지나면 화장실 들락거린다. 2) 사고력이 떨어진다. 왜? 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답해본 경험이 드물다. 부모나 선생이 뭘 물으면 금방 ‘몰라’ , ‘네’ 혹은 ‘아니요’라는 지독하게 간단한 답만 돌아온다. 문장 세 개라도 잇달아 나온다면 그건 훌륭한 대답에 속할 정도다. 3)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한 동기가 없다. 막연하게 미래에 대해 생각만 많고 조금 노력하는 체 하다가 쉽게 포기한다. 

자, 이상이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이유 뒤에는 진짜 이유가 한가지 더 있다. 그게 사실은 가장 중요한 이유다. 아이가 공부를 잘 못하는 이유는 십중팔구 부모와 관련되어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부모의 ‘자본’ 그 중에서도 ‘문화적 자본’이 별로 없을 때 아이가 공부 잘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세상에는 세 가지 자본이 있다고 한다. ‘경제적 자본’은 그야말로 돈 그 자체다. 돈이 없으면 ‘좋은 학군’에 못살고 ‘족집게 과외’는 꿈도 못 꾼다. ‘사회적 자본’이란 좋은 말로 네트워크 할 수 있는 힘, 나쁜 언어로는 혈연 지연 학연을 총괄하는 ‘연줄망’이다. 그것을 얼마나 풍부하게 또 핵심부에 가깝게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주변 동창, 외삼촌, 고향 선배가 가령 기자, 변호사, 교감, 교수이거나 예술가라고 가정 해보자. 뇌물을 먹여 입시를 통과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연줄망을 통해 대학 선택이나 취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삼척 동자도 다 아는 얘기다. 동시에 수시로 직업, 공부, 진로에 관련된 고급정보 및 조언에 접할 수 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자라난 아이들이 ‘자극’을 받아 강한 동기 부여를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자, 이쯤 되면 이 글을 읽는 학부모들은 한숨을 쉬거나 분노할지도 모른다. 그 두 가지 자본 전혀 없는 대다수 사람들은 죽으라는 얘기냐고 말이다. 쉽게 포기하시면 안 된다. 자녀들이 그대로 배운다. 아직 한가지 얘기가 더 남아있다. 

‘문화적 자본’이란, 한 사람 혹은 가족이 갖고 있는 ‘학습’된 지적 문화적 수준이다. 그것은 주로 공식적인 학력에 따라 결정되지만 무관한 경우도 꽤 있다. 아이들의 부모 혹은 주변 어른 중에 고학력자가 많을 수록 문화적 자본이 많다고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문화적 자본은 현재의 것이다. 고학력자가 아무리 많아도 현재 아이들 주변에서 끊임없이 책 읽고 책방, 전시회, 박물관, 음악회 가는 사람이 없다면 ‘꽝’이라는 얘기다. 생각해보자.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틈만 나면 책방에 아이들 데려가거나 영화 보고 차 한 잔 하며 함께 뒷 얘기를 나눈다면? 한 달에 한번쯤은 싸구려 음악회라도 기를 쓰고 간다면? 이 주일에 한번쯤은 인사동 및 삼청동의 갤러리에 (서울 공화국 주민들 경우) 바람 쐬러 나간다면? 매일 저녁 먹고 나서 신문 읽으며 엄마 아빠가 사회 문제에 대해 열올리며 ‘토론’하는 집안이라면? 그리고 옆에서 부부싸움 구경하는 듯한 딸 혹은 아들에게 ‘판정’을 요구하는 분위기에서 자라난 아이라면? 엄마나 아빠가 혹은 같이 사는 이모, 고모, 삼촌이 독서광이라면? 그래서 쉴새 없이 아이에게 책을 사주고 추천하고 이메일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이라면?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집중력이 떨어지고 동기가 약하고 선생님 질문에 세 단어 미만의 언어로 답할까? 공부 잘 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 그게 아니라면 한국의 입시제도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 및 자신의 창조적 개성을 보호해나가려는 의지가 강해 대안학교 가거나 자퇴하고 검정고시 한다고 설칠 수 있다. 이쯤 되면 부모가 아무런 걱정 할 필요가 없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공부 못한다 해도 또 대학에 못 가거나 안 간다 해도 그 아이는 반드시 자신의 꿈을 실현하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서태지’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갑자기 경제적 사회적 자본을 키울 수는 없다. 문화적 자본도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고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문화적 소양의 일부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자본과 달리 부모의 결심과 노력에 따라 큰 돈 들이지 않고도 비교적 짧은 기간에 축적할 수 있는 자본이다. 오늘부터라도 엄마 아빠가 밥상 물리고 나서 책과 신문을 매일 읽기 시작하자. 연속극과 연예가 중계는 가끔만 보기로 하자. 틈만 나면 스스로 전람회나 콘서트 쫓아 다녀보자. 술 먹는 돈, 쓸데없는 과외비를 줄이고 인터넷 정보를 뒤져보면 서민 수준에서도 이런 ‘문화’ 생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리고 틈 나는 대로 자녀들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갑자기 ‘쥐약’ 드셨나 하고 뜨악한 표정을 짓겠지만 한 달이 가고 열 달이 가면서 아이들은 저절로 책을 읽게 될 것이고 어느 날 쉴새 없이 부모들에게 질문을 하게 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고등학생만 되어도 늦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부모들의 문화적 자본은 드러나기 시작하야 한다. 물론 그 준비는 부모 되기 전 20대 시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실 대학에서 공부를 풍부하게 깊이 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로는 자신이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것이지만 그 다음으로는 (독신자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니지만) 현명하고 문화적인 부모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 부모님은 긴 세월 가난에 시달리셨고 모든 학교 중퇴 경력으로 ‘사회적 자본’이 전무하신 분이었다. 그렇게 공부를 싫어하고 머리도 평범한 내가 고교를 생략하고도 대학에 가고 또 유학 시절 개성적 비판적 의견이 최고 무기인 대학원 세미나 수업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던 것은 옆에서 끊임없이 책과 신문을 읽으시고 자식들과 토론하기를 즐겨하셨던 두분의 ‘문화적 자본’ 덕택이라는 것을 어느 대학원 수업에서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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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대 정외과 교수. 당대비평 편집위원. dju.ac.kr/~kwonh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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