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시민 불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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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자료   소로와 간디



1.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생애 : 행복한 삶은 자연에서 시작된다  









“만약 대학들이 현명하다면 졸업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졸업장과 더불어, 아니 졸업장 대신 「월든」을 한 권씩 주어 내보낼 것이다.”    E. B. 화이트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는 28세 때인 1845년에 친구에게 도끼 한 자루를 빌려 월든 호숫가의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직접 통나무집을 지어놓고 2년 2개월 동안을 살았다. 「월든-숲 속의 생활」은 소로가 숲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이 살 집을 짓고,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면서 겪고 느꼈던 가장 자연적이며 인간적인 삶에 관한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그러나 생활의 편리함을 위해 간단한 도구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인간은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달을 통해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정작 자신의 삶의 공간인 자연과 멀어졌으며 더 나아가 자연을 파괴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소로는 「월든」을 통해 인간이 온갖 지혜를 다 짜내어 인간의 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든 문명이 오히려 자연의 보존과 인류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편리함으로 포장된 잘못된 삶의 방식을 버리고 인간에게 참다운 이익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문명을 통해 만들어낸 사회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끝없이 경쟁만 할 뿐, 인간적인 삶과는 너무나도 많이 동떨어져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소로의 「월든」은 지난 150여 년 동안 수많은 사상가와 문필가, 정치가들에게 영향을 끼쳐왔다. 마하트마 간디는 소로가 주창한 ‘시민 불복종’운동에서 자신의 ‘무저항 비폭력’이라는 독립운동 방식을 이끌어냈으며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과 마르셀 푸르스트, 윌리엄 예이츠와 같은 문인들과, 자연주의자인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 역시 그의 통찰력에 깊은 감화를 받았음을 토로한다. 또한 최근의 환경운동가들은 「월든」을 최초의 녹색서적으로 평가하며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모델로 삼고 있다. 1817년 7월 12일 미국의 동북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서 태어난 소로의 삶에 영향을 준 것은 바로 콩코드의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인디언이 살던 땅 ‘콩코드’는 비옥한 토지와 거대한 숲, 강물이 끝없이 이어지는 지역으로, 소로는 그곳에서 경이로운 자연의 법칙과 소중함을 직접 체험하며 자랐다. 미국은 1830년대에 이르러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근대국가로 발돋음하는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1833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한 소로는 그리스ㆍ로마 고전에 심취했으며 영문학은 물론 수사학과 함께 자연사를 공부하며 인디언의 유물들에 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1837년에 대학을 졸업한 그는 콩코드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단 2주 만에 교단을 떠나게 된 것은 ‘매질 대신 도덕적 훈계로 학생들을 가르치겠다’는 그의 소신을 학교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1838년부터 형인 존과 함께 사설학교를 운영했다. 소로는 28세가 되던 해인 1845년 봄에 오래 전부터 꿈꾸어 오던 자연 속의 생활을 위해 월든 호숫가에 정착했다. 그는 월든 숲속에서 보낸 2년 동안 직접 노동을 하고, 독서와 사색을 즐기며, 친구들과 교제하며, 자연을 관찰하며 생활했다. 입을 것과 먹을 것에 집착하지 않고 먹을 만큼만 스스로 경작하여 해결하고 그외의 시간은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과 교류하는 생활이었다. 세속적인 성공을 거부한 채 숲속의 이모저모를 관찰하기 시작한 그는 서서히 대자연과 동화하기 시작한다. 숲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아름답고 신비롭다. 월든 호수와 그 주변 자연환경에 대한 묘사는 압권이라 할 수 있다. 들꿩과 개미떼와 오리들 그리고 계절의 변화와 함께 드러나는 자연의 경이로움에 흠뻑 빠져든 그는 사색과 독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더욱 굳건히 한다. 언제든지 마음이 내킬 때마다 강이든 숲이든 발길이 닿는 대로 산책하는 동안 그의 생각은 더욱 성숙해졌으며 특유의 문체도 완성되었다.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 미국의 영토 확장 정책(멕시코 전쟁)에 대한 깊은 불신과 노예제도에 반대했던 그는 1846년 7월에 인두세(人頭稅)의 납부를 거부하여 투옥되기도 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1849년 소로는 무정부주의적 견해가 표명되어 있는 연설문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바로 후대의 간디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민의 불복종 Civil Disobedience」이다. 또한 그해 8월에 그가 지닌 철학의 진수를 담고 있는 「월든」을 출간했다. 「월든」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2년 동안 월든 호숫가에서 오두막을 짓고 살면서 직접 체험한 자연의 단순한 진리들에 대한 소개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폐결핵에 걸린 이후 물질보다 영혼을 중시하고 육신보다 정신을 중시하는 그의 사상은 죽음이 임박할수록 한층 공고해졌다. 그의 신체는 병마로 약해져 갔지만 정신만은 더욱 더 명료했다.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늘 변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소로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유지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죽음의 고통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어떤 것들은 끝마치는 것이 당연히 더 좋은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어느 곳 하나 소로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콩코드 마을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기념비다.” 현재 소로가 살았던 월든 호숫가의 오두막이 있던 장소에는 그를 기리는 돌무덤 하나가 쌓여 있다. 붉은 돌로 된 그의 묘비에는 이름과 사망한 날짜 이외에는 어떤 글도 새겨져 있지 않다. 









2. 마하트마 간디의 생애와 사상









현대 인도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간디였다. 흔히, 간디는 인도 독립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명실 공히 국부(國父)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는 위대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이다. 간디는 아라비아 해에 인접한 인도 서해안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조혼의 지방 관습 때문에 열세 살 때 결혼하였으며, 열아홉 살 때(1888) 영국으로 유학하였다. 엘리트 코스라고 할 수 있는 이너템플 법과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곳에서 새로운 문명 생활에 접한 그는 오히려 인도인으로서의 깊은 자각을 느꼈다. 그는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얻고 다시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1894년에는 남아프리카에 있는 인도인 상사의 고문 변호사로서 근무하였다. 그곳에서 흑인들이 겪어야 하는 신분상의 불이익, 백인들의 횡포 등에 맞서서 매우 열정적으로 일하였다. 그는 20여 년 동안을 남아프리카에 머물면서 특히 인권 옹호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간디는 늘 ‘바가바드기타(Bhagavadgita)’를 탐독하였다. 신애(信愛), 보시 등을 강조하는 이 민족시에서 그는 언제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잠잘 때 이외에는 잠시도 ‘바가바드기타’를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였다. 문학인으로는 톨스토이, 러스킨 등을 특히 좋아하였다. 남아프리카로 건너가던 해인 1894년에 인도인 국민회의를 결성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였고, 1895년에는 인두세(人頭稅) 반대 투쟁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인도 분열의 원인을 영국의 제국 지배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도인들의 지역 감정과 종교적 분쟁에도 간접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인도인들에게는 향토에 대한 자부심은 있었지만 조국이라는 개념은 희박하였다. 그는 조국에 대한 관념을 국민들에게 불어넣어 주려고 했던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간디는 다시 인도로 돌아왔다. 그 당시 영국은, 만약 인도인들이 이 전쟁에 협력해 준다면 자치를 시켜 주겠다고 공언하였다. 간디는 그 약속을 믿고, 진두에서 인도인들의 단합과 영국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대전이 끝난 후 그 약속은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언론이나 결사(結社) 등을 통제하고, 더욱 강압적인 정책을 펴 나갔다. 이것을 계기로 하여 전 인도에는 반영(反英) 운동이 일어났다. 간디는 이 전 인도적 민족 운동의 선두에 섰다. 약소 민족의 자결 자주권을 부르짖고,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가 창간한 기관지 Young India는 그와 같은 비판적 언론의 효시였다. 그는 영국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을 반납하고, 영국 제품 불매 운동, 물레의 장려, 비폭력 무저항주의 등의 범국민적 운동을 전개하였다. 물레의 장려는 산업화를 반대하는 상징이었다. 즉, 비인간화의 길을 걷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이다. 또, 폭력을 없애려고 사용하는 ‘폭력’에도 그는 반대하였다. 철저한 비폭력으로 무력의 압제를 벗어나게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의 평소 생활은 극도의 금욕과 절제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이웃에 대해서는 매우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종교에 대해서도 매우 융합적인 태도를 보여서, 그가 지은 수도원의 기도문에는 ‘힌두 성전’을 비롯하여 ‘코란’, ‘성경’, ‘불경’ 등의 문구를 망라할 정도였다. 1930년 초, 간디는 노령을 이유로 하여 정치 투쟁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젊은 정치 지도자 네루 등에게 그 자리를 맡긴 채 묵상과 헌신 등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또다시 정국은 구심점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간디는 다시 민족 운동의 선봉에 서서 나치의 잔학성에 항거할 것을 호소하였다. 동시에 대규모의 반영 투쟁을 전개하면서 명분 없는 싸움의 종식을 주장하였다. 그 때, 의회의 지도자들은 거의 투옥되었으며, 간디도 예외는 아니었다. 옥중에서 간디는 아내를 잃었다(1944).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평화적으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그 독립은 파키스탄과 인도를 갈라 놓는 반 쪽의 독립이었다. 인도 북부 지역에는 무슬림들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힌두를 선봉하는 남부 인도와는 마찰이 잦았다. 끝내 무슬림의 파키스탄과 힌두의 인도가 분리 독립되었을 때, 그 독립식에 간디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무슬림과 힌두의 융합을 외치면서 인도를 누볐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회색 분자로 낙인이 찍혀 어느 한쪽으로부터도 절대적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간디는 굴하지 않고 유세를 계속하였다. 간디가 콜카타의 빈민가에서 양 종교의 화해를 호소하였을 때, 심한 투석을 만난 적도 있었다. 1948년 1월 30일, 간디는 저녁 기도를 올리던 중 괴한의 저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힌두, 이슬람의 융합을 반대하는 과격 힌두 교도의 총탄이었다. 그 때 간디의 나이는 79세였다. 혼란기 인도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였던 간디의 이념은 그 후계자인 네루의 평화 사상으로 계속되었다. 간디의 사상 중 근간을 이루는 것은 비폭력에 의한 무저항주의이다. 아힘사(Ahimsa)라고 부르는 그의 비폭력주의는 많은 인도인들의 호응을 얻었다. 간디는 “비폭력은 인간적으로 가능한 극한의 완벽성을 갖춘 자기 정화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무력과 남에의 혐오를 폭력으로 다스리려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폭력은 반드시 또 다른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정의를 확보하기는커녕 또다른 피의 복수를 유발시키는 끝없는 윤회일 뿐이다. 간디가 신조로 삼은 비폭력주의는 인간의 상호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그의 비폭력주의는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투쟁의 테크닉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완결하려는 휴머니즘의 전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외치면서 ‘자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1) 참된 자치는 자기 지배, 즉 자기 억제이다.


2) 그 길은 무저항, 즉 영력(靈力) 혹은 애력(愛力)이다.


3) 그 힘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국산품 애용이 필요하다.


4) 우리가 하려는 바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보복하기 위해서 영국인에게 반대함이 아니다. 그렇게 함이 우리들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즉, 자치란 결국 각자의 도덕적 책임의 완수이다. 따라서 참된 민주주의는 폭력적 방법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동등한 기회와 편리를 줌으로써 자기완성의 편의를 마련해 주는 데 있는 것이다. 간디의 이와 같은 자치 이념은 도시나 혹은 몇몇 지식인들 사이에서 거론되는 관념의 유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그것은 도시가 아닌 농촌에서, 또 큰 저택이 아니라 초가집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농촌 생활의 검소, 소박, 자연 속에서 진실과 비폭력이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상징인 소금의 행진” 



인간에게 주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정신의 안락이다. 오히려 지나친 풍요는 인간 정신을 타락시키기 때문에,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했다. 바로 이 점에서 네루와 간디는 견해를 달리한다. 네루는 합리적인 계획에 의해 공업화, 산업화를 이루어서 빈곤한 농촌을 개발하고 복리를 누리게 하는 것은 당면의 급선무로 생각하였다. 네루는 전근대적이고 낙후한 인도의 농촌을 근대화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과학과 기술로써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만이 인도의 목표라고 생각하였다. 인도 독립 이후 간디와 네루는 사실상 사상적 결별을 이루었다. 당시의 집권당 국민 의회당은 네루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간디는 네루의 독주에 쐐기를 박는 일종의 압력 정책을 계획하고 있었다. 간디는 네루의 선정권에 가담하지 않는 국민 의회당의 몇몇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단체를 결성하려고 했다. 그것은


첫째, 불가촉 천민(不可觸賤民, Harijan) 제도의 철폐를 위한 단체


둘째, 기초 교육을 보급시키는 단체


셋째, 힌디 어를 국어로 보급하려는 운동 단체


넷째, 물레 생산 보급 단체


다섯째, 봉사의 단체 등이다.


이것은 네루 정권에 대한 간접적 압력 단체였다. 간디는 네루의 공업화 정책에 따르는 비인간화 현상, 그리고 네루의 일당 독재화 등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간디 자신이 분명히 밝혔듯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 집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네루의 정책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자문 단체였을 따름이다.









시민 불복종에 대하여









1. 시민 불복종의 등장 배경









① 등장 배경 : 개인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제도나 공권력 또는 정의롭지 못한 법들이 존재할 경우, 이에 대항하기 위해 등장함


② 소로

“나는 오늘날 미국 정부와의 관계에서 매우 수치감을 느낀다. 나는 노예의 정부인 정치적 조직을 나의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 …… 불의의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 …… 노예 제도 폐지론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몸으로든 재산으로든 매사추세츠 주 정부를 지원하는 일을 지금 당장 중지해야 한다. 그리고 정의가 승리하도록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한 표 앞선 다수가 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위의 글은 소로의 주장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Thoreau, H.D., 1817~1862)가 살던 당시 미국에는 노예제가 있었다. 북부 지역은 생산 기계가 도입되어 노예가 많이 필요하지 않아 노예제의 폐지를 주장하였고, 노예가 많이 필요한 면화 생산이 주요 산업이던 남부 지역에서는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노예제를 묵인하였다. 그는 노예제를 묵인하는 정부를 지지할 수 없었다. 그는 합법적인 절차로 노예제 폐지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고, 미국 정부에 대한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항의의 표시로 납세 능력의 차이에 상관없이 개인에게 똑같이 매기는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여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그는 ‘국가가 불의한 일을 시민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며, 시민은 그러한 국가의 강요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라는 시민 불복종론을 펼쳤다.


③ 시민 불복종의 사례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을 전개한 마틴 루터 킹의 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히피 반문화 운동, 학생 운동 등, 여성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미국과 영국의 시민운동,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분리 정책에 대한 반대 운동, 1980년대 우리나라 방송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

“정당한 법과 부당한 법의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봅시다. 부당한 법은 수와 힘의 측면에서 다수에 속하는 그룹이 소수 그룹에 대해서 준수를 강요하면서도 자신들은 전혀 구속받지 않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정당한 법은 다수 그룹 자신이 자발적으로 준수하면서도 소수 그룹에게 대해서 준수를 강요하는 법입니다. …… 표면상으로는 정당하지만 실제 적용에서는 부당한 법도 있습니다. 저는 허가받지 않은 시위행진에 참석한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습니다. 시위행진을 허가 사항으로 규정한 법령 그 자체는 부당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일 이 법령이 흑백 차별을 유지하고 (미연방 헌법) 수정 조항 제1조의 평화적인 집회와 항의를 할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서 이용된다면, 그것은 부당한 것이 됩니다.” 


위 글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주장이다. 1929년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킹 목사는 흑인들에 대한 차별 대우와 경제적 불평등을 보면서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였다. 그는 신앙에 바탕을 둔 사회 개혁을 꿈꾸며, 예수의 사랑의 가르침에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접합시켰다. 그의 비폭력주의는 단순한 평화주의가 아니라 저항은 하되 폭력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백인 기득권층과 정부의 공권력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세에 있던 흑인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이러한 비폭력주의에 입각한 민권 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 시민 불복종의 의미









① 소로 : 정의롭지 못한 법이나 정부 정책을 변혁시키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의도적인 위법 행위, 시민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에 대한 규범적 · 윤리적 근거를 널리 알리기 위해 법을 공개적·의식적으로 위반하는 것


② 롤스 : 어느 정도 정의로운 민주주의 체제에서 특정한 법률이나 정책 또는 명령이 정의의 원리를 어겼을 경우 이를 알리기 위해 다수자의 정의감에 호소하는 정치적 행위, 합법적인 민주국가에서의 시민 불복종이 정당화되기 위한 조건을 설명함 → 억압적인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시민 불복종이 인정될 수 없음


③ 기본권을 침해하는 부당한 법을 폐기시키거나 바꾸기 위해 그것을 위반하는 행위


④ 명백히 정의롭지 않은 사회 제도가 시행되어 개선의 여지가 매우 적을 경우, 이러한 제도를 따르지 않고 이에 저항하는 비폭력적 시민운동









3. 시민 불복종의 정당화 조건









법에 대한 시민 불복종은 정의의 이념에 기초하여 법의 정신을 존중할 때에 그 정당성을 갖는다.


① 행위 목적의 정당성 : 자기 이익을 배제하고 정의의 원리를 따른다는 신념


② 최후의 수단 : 먼저 합법적인 개혁의 방법을 동원하고, 그것이 효과가 없어야 함


③ 비폭력 : 평화적 방법 사용,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행동이나 폭력을 수반하는 행동은 시민 불복종과 양립할 수 없다.


④ 처벌 감수 : 부당한 법을 어김으로써 받게 되는 처벌 감수하여 법에 대한 존중심을 가지고 사회 구성원들의 양심에 그 법의 부당성을 호소함









4. 세계 시민의 불복종 운동 사례 









1. [씨애틀 세계무역기구(WTO)회의 반대운동]  (한겨레신문 : ‘뉴라운드’ 긴장 고조되는 시애틀. 1999. 11. 29. 월)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들의 뉴라운드 협상을 둘러싸고 회의장 안팎에서 날카로운 대립과 갈등이 예상된다. 미국 언론들은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가 열리는 30일 5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릴 것으로 예상했으며, 이들 시위대 중 일부는 회의 개최 자체를 막기 위해 시민불복종 운동도 벌일 것으로 보인다고 28일 전했다.반세계무역기구 민간단체인 `디렉트 액션 네트워크’의 데니스 모히니언 사무국장은 이날 우리의 목적은 세계무역기구를 폐쇄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번 회의도 개최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노동조합 조직을 비롯해 환경단체, 세계무역기구의 해체를 주장하는 단체 등에서 대규모 시위를 준비중이다. 이런 가운데 국제 자유노조연맹과 미국의 최대 노조인 전미노동총동맹산업별회의(AFL-CIO)의 지도자들은 세계무역기구가 이번 협상에서 노동자권리를 보호하는 노동기준을 이번 뉴라운드 협상에서 포함시킬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빌 조던 국제 자유노조연맹 사무총장은 만약 세계무역기구 회원국 각료들이 노동기준을 협상의제로 택하지 않을 경우 그들은 세계무역기구의 종말이 시작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 [인권의식 일깨우는 중국 파룬궁 시위]  (중앙일보[글로벌뷰] -아시안 월 스트리트 저널 11월 2일자: 1999. 11. 3. 수)

 중국 당국에 의해 불법으로 규정된 파룬궁(法輪功) 추종자들이 1일 평화적 항의를 위해 베이징(北京) 천안문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책상다리로 앉은 채 농성을 벌이다 경찰봉에 의해 구타당하거나 연행됐다. 일부 파룬궁 추종자들은 그들의 비상업적, 비정치적이며, 중국 법률제도에 의한 희생자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들의 활동을 보고 외부세계 사람들은 과거 미국의 흑인운동이나 인도의 비폭력 독립운동을 떠올리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은 이런 종류의 평화적 불복종 대중운동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운동이 당장은 중국의 보통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파룬궁 수련자들은 자신들의 주장과 달리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이미 정치적 발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파룬궁뿐만 아니라 점차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는 다른 종교집단들이 중국인들의 동정과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도 관심있게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이같은 현상들이 공산당 지도체제에 심각한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공장소에서 시위대들의 머리를 잡아채고, 여성을 고문해 죽음에까지 이르도록 하는 것은 이런 사태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촉진시킬 수도 있다. 조지 오웰은 시민불복종 운동이 소련의 스탈린 체제 같은 데서 얼마나 실효성을 가질 것인가를 반문하며 간디의 이상주의를 비판했었다. 물론 시민불복종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선행조건이 있다. 우선 정부의 불의를 대중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자유로운 언론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는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사생활의 권리에 대한 대중들의 확고하고도 광범위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또한 권력의 남용을 스스로 경계하는 도덕적인 인사로 구성된 정부도 필요하다. 중국은 더 이상 옛 소련과 같은 전체주의 국가로 취급되지는 않지만 파룬궁 운동이 성공하기에는 위에서 든 세가지 요건이 아무래도 부족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중국 당국이 종교적 운동을 미신으로 치부하며 탄압하면 할수록 점점 더 항의의 파고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파룬궁은 서구의 천부인권 개념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으며, 이런 의식은 점점 더 커질 게 틀림없다.



 3. [해커그룹 「에셜런 파괴의 날」 선언]  (경향신문 [사회 ] 1999. 10. 24. 일)

 최근 「에셜런 파괴의 날」을 선언한 해커그룹들은 이른바 사이버 공간에서 절대권력에 대항해 「성전」을 벌이고 있는 「ECD(electronic civil disobedience 전자 시민불복종)」 세력들이다. 이들은 현재 미국은 물론 호주,영국,프랑스,중국 등 세계 도처에서 「핵티비즘」을 기치로 정보의 완전한 통제를 추구하는 국가권력과 맞서고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미국 정부로 대표되는 「빅 브라더」가 전화나 E―메일 등을 도/감청함에 따른 사생활 노출로부터의 자유와 사이버 공간에서의 「풀뿌리 민주주의」다. 인터넷의 보편화가 이뤄지기 시작한 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이들의 활동은 인터넷과 첨단 통신시스템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감시의 눈」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사이버 시대에서 사생활의 침해는 물론 특정한 국가의 헤게모니를 절대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된다는 점에 반기를 들고 있다. ECD그룹의 멤버들은 지난 10년간 세계 곳곳에서 때로는 드러내놓고, 때로는 「아무도 모르게」 국가 기간전산망이나 정부 정보기관의 데이터베이스를 파괴해왔다. 지난 98년 영국의 「JF」라는 멤버는 영국과 미국의 기간전산망과 웹사이트에 접속, 정부의 감청활동 폭로와 반핵을 주장하는 글을 올려 놓기도 했고, 월드와이드웹(WWW) 외에도 뉴스그룹을 이용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세계로 알리는 일을 하기도 한다. 에셜런 파괴의 날 공작도 상당부분 뉴스그룹을 통해 이뤄졌다. 이들의 주요활동은 사이버 공간에서 「바리케이드」치기와 「점거농성」으로 요약된다. 사이버시대 이전의 시민불복종 운동단체들이 현실공간에서 몸으로 이같은 일들을 벌인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현재 ECD그룹에 속한 시민운동가들의 숫자를 정확하게 파악해내는 것은 쉽지 않으나 유럽 신문들은 이들이 대략 전세계적으로 수백만명을 쉽게 넘어 선다고 추정한다. 이들은 최근에는 활동범위를 과감하게 사이버공간 밖으로 확대하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지난 95년에는 미국 뉴욕의 ECD그룹을 중심으로 「전자 시민불복종과 비주류 아이디어」라는 책이 발간돼 이들의 활동이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ECD 멤버들은 자신들이 해커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익명을 고집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그들의 주장을 거리에서나 대중매체에서 자유롭게 배포한다. 이제 ECD그룹은 단순한 점거농성이나 E―메일 테러 등에서 벗어나 활동을 현실의 시민운동 영역으로 넓히려 하고 있다. 미국 등의 정보기관 방해도 만만치는 않지만 사이버시대의 「풀뿌리 민주주의」 주역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이들의 활동을 주목해볼 일이다.



 4. [여배우 수전 서랜든, 폭압경찰 징계 온몸 투쟁 승리]  (중앙일보 [ 해외 ] 1999. 4. 6. 화)

 사형 제도를 비판한 영화 ‘데드맨 워킹’ 으로 96년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수상한 수전 서랜든 (53)의 정의사회를 향한 열정이 무자비한 공권력의 남용을 꺾었다. 지난 2월초 아마도우 디알로 (22) 라는 아프리카 이민 출신 흑인청년이 늦은 밤 행상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아파트 현관에서 그를 강간범으로 오인한 백인 경관 4명으로부터 41발의 총탄세례를 맞고 숨졌다. 뉴욕 경찰청 앞에서는 흑인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연일 항의시위가 벌어졌고,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 (NAACP) 까지 가세했다. 그러나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오히려 뉴욕경찰의 사기저하를 걱정하고 있었다. 분노한 서랜든은 오지 데이비스.루비디 등 동료배우들과 함께 뉴욕 경찰청 앞으로 달려가 시위대에 합류했다. “정의가 없으면 화해도 없다” 는 구호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정문출입을 가로막아 피의 경찰관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시민불복종 시위’ 를 주도했다. 그는 지난 달 말 흑인 인권 운동가 제시 잭슨 목사, 데이비드 딘킨스 전 뉴욕시장 등과 함께 뉴욕 경찰청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다 공무집행방해로 체포되기도 했다. 체포자수가 1천2백명을 돌파하는 등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빌 클린턴 대통령도 라디오 연설을 통해 “뉴욕경찰이 직권남용을 했다”며 편을 들고 나섰다. 결국 줄리아니 시장은 지난달 31일 문제의 경찰관 4명을 살인혐의로 기소하고 소수인종 출신 경관의 충원 등 경찰개혁안을 내놓았다. 서랜든 등 시위 주도자들은 “폭압적인 경찰행정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며 승리를 선언했다.



5. [프랑스] 외국인 차별 개정 이민법 반대운동 (한겨레신문 1997. 2. 28. 금)


 10만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반대시위와 시민불복종 운동을 불러일으키며 논란을 빚어온 프랑스의 새 이민법이 지난 27일 하원에서 야당의 반대 속에 통과됐다. 이 법안은 상원의 심의를 거쳐 확정될 예정이다. 애초 반대 시위의 초점이 됐던 조항은 외국인에게 숙박을 제공한 프랑스인은 해당 외국인이 프랑스를 떠난 뒤 8일 안에 그 사실을 해당 구청에 신고해야 한다”는 규정으로, 이전 심의에서 완화됐지만 전체적으로 강화된 이민규제 내용을 담고 있다. 즉 경찰이 불법이민자의 여권을 압수하고 불법이민자 고용 혐의가 있는 업체를 수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10년 단위로 자동 갱신하도록 돼 있는 장기 체류자의 체류증 갱신에도 프랑스내 주거확인을 요구했다. 또 지난해 생베르나르 성당 에서의 단식투쟁의 원인이 됐던 프랑스인의 배우자나 프랑스 국적을 가진 미성년자의 부모에 대한 체류 허가문제는 엄격한 조건을 붙이는 것으로 보완됐다. 이처럼 이민규제 강화법안이 마련돼 통과되고 있는 현실은 프랑스 사회의 우경화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는 프랑스 사회가 겪고 있는 실업난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들 탓으로 여기게 하는 것으로 실제와 거리가 있음이 27일 발표된 국립 경제통계연구소의 이민관련 통계에서 확인된다. 통계에 따르면 95년 현재 이민인구는 프랑스가 육체노동자에 대한 이민 문호를 닫은 75년 이래 그 비율이 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고, 또 이들 이민자는 프랑스 평균 실업률인 1 2.7%보다 훨씬 높은 20%대의 실업률에 시달리고 있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영화감독 59명의 호소로 시민불복종을 요구하는 횃불을 든 이래 확산돼 온 반대움직임은 지난 17일 고등학생들까지 거리에 나서게 만들었고 이날 시위로 그 절정을 맞았다. 각계 지식인 12만명의 반대성명과 10만명 이상이 동원된 대규모 시위 등으로 이어졌는데 결국, 이민법 철회라는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규모 지식인들이 법안 반대운동의 전면에 나서 이민법의 쟁점조항을 수정케 한 사실은 프랑스 지식인들의 `앙가주망’ 전통이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영화-철학 탐구활동 과제>

☞ 영화 감상 후 QR코드 링크로 영화-철학 심화탐구활동 과제를 제출하세요.

☞ 아래의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으시오.

☞ [질문] 시민불복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논술하시오.

☞ 과제 제출 링크. https://forms.gle/v4zew7hC2qysRDM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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