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사랑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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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일의 썸머 – 여성의 시각으로 해석> 출처 : 유투브 Pu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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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자료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  에리히 프롬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사랑의 본질을 분석하고 사랑에 대한 기술을 논의한 책이다. 인류의 영원한 화두인 ‘사랑’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주는 저작으로, 1956년 처음 발표되어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사회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연적 현상으로 보지 않고, 기술적 문제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만이 아니라, 결의이고 판단이며 약속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기술>에는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 <자립적 인간>, <건전한 사회> 등의 이전 저작들에서 밝힌 사상,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또 다른 사상이 제시된다. 그리고 이것들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집중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1. 저자소개 : 에리히 프롬  

에리히 프롬은 한평생 근대인에게 있어서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었으며 소외를 넘어선 인본주의적 공동체를 위해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속의 적과 싸운 사람이었다. 그는 마르크스로부터 사회 구조의 변혁에 대한 감각을, 프로이트로부터 인간의 심연을 분석하고 해방하려는 의도를 배웠다. 방법론적으로는 ‘사회적 조건’과 ‘이데올로기’ 사이에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을 설정하였으며 이 3자의 역학관계에 의해 역사와 사회의 변동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사회심리학이라는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근대 사회의 숨어있던 성격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는 이러한 방법론을 적용하여, 납득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광기로 가득찬 나치즘을 수용하고 지지한 대중들의 심리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나온 책 <자기로부터의 도피>는 에리히 프롬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림과 동시에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론이 확립되었음을 선언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책은 감당할 수 없는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한 근대인의 심리적 기반이 나치즘이라는 우상을 수용했음을 밝힌 것이다. 

나아가 프롬은 사회심리학적 시각으로 현대인들의 소외의 양상을 유형별로 고찰하고 근대적 세계 속에서 인간이 참다운 자기를 실현하여 가는 길을 찾고자 하였다.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은 그러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야말로 인간을 소외로 몰고 가는 근본적인 틀임이 거듭 밝혀지고, 이를 넘어서고자 할 때 인간 개인의 내면적 해방과 사회구조의 변혁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고 프롬은 주장한다. 이를 통해 <건전한 사회>, 즉 인본주의적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요 삶의 보람이라는 것이 프롬의 생각이다. 이러한 프롬의 주장은 너무나 원론적인 것이어서 때로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문제 인식과 방향 설정에 하나의 유효한 도구가 됨은 부인할 수 없겠다. 

2.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

(1). 사랑은 기술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즉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으로서가 아닌 ‘사랑받는’ 것으로 본다. 어떻게 하면 사랑받는가, 사랑스러워지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대상’의 문제이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빠지는’ 첫 번째 경험과 사랑을 하고 ‘있는’ 지속적인 상태를 혼동한다. “사실상 그들은 강렬하게 열중하는 것, 즉 서로에게 ‘미쳐버리는’ 것을 자기들 사랑의 열도(熱度)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다만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외로웠던 정도를 입증해 보인 데 불과한 것이다.” 사랑은 기술인가?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필요하다. 아니면 사랑은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게 되는, 다시 말하면 운만 좋으면 누구나 ‘맛볼 수 있는’ 즐거운 감정인가? 이 책은 사랑은 기술이라고 하는 견해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현대인들의 대부분은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이 사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뜻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사랑을 갈망하고, 행복하거나 불행한 사랑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 수많은 영화를 구경하고, 사랑을 노래한 수백 가지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러한 태도는 몇 가지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다. 첫째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즉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사랑의 문제가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들이 이 목적을 추구하는 데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남자들이 애용하는 방법은 몸을 단장하고 옷치장을 잘하여 매력을 갖추는 것이다. 남녀가 애용하는 또 한 가지 매력 전술은 유쾌한 태도와 흥미있는 대화술을 익혀서 유능하고 겸손하고 부드럽게 처신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스러워지는 여러 가지 방법은 성공하기 위해, 즉 ‘벗을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과 같다. 사실상 우리 문화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스럽다고 말할 경우, 거기에는 본질적으로 인기와 성적 매력이 뒤섞여 있다. 

사랑에 대해서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는 태도의 두 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설이다. 사람들은 ‘사랑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또는 사랑받을-올바른 대상의 발견이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에는 근대사회의 발전에 기초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사랑의 대상’의 선택에 대해서 20세기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이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많은 전통적 국가의 경우처럼 사랑이 결혼처럼 연결되는 자발적이며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었다. 반대로 결혼은 관습에 의해-쌍방의 가족에 의하거나 중매인에 의해, 또는 중매인 같은 중개자의 도움 없이-계약되었다. 결혼은 사회적 고려를 바탕으로 결정되었고, 사랑은 일단 결혼이 성립한 다음에 전개되는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개념이 서양에서 거의 보편화된 것은 최근 수세기 동안의 일이었다. 미국에서는 관습적인 고려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낭만적인 사랑’, 즉 결혼으로 연결되는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 사랑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새로운 자유화의 물결은 ‘능력’의 중요성과 대립되는 것으로서 ‘대상’의 중요성을 드러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현대 문화의 특징적 성격은 이러한 요소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현대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購買浴), 혹은 상호간의 유리한 거래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상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전율과 살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현금 또는 월부로 사는 맛, 이것이 현대인의 행복이다. 그는(또는 그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본다. 남자에게는 매력 있는 여자 – 여자에게는 매력 있는 남자 – 가 탐나는 경품(景品)이다. ‘매력’은 보통 인기 있고 개성 있는 시장에서 잘 팔리고 있는 품질 좋고 멋진 포장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매력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 시대의 유행에 달려 있다. 1920년대에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튼튼하고 성적 매력이 넘치는 소녀가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오히려 가정적이고 얌전한 것이 매력적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매력적인 ‘포장’이 되려면 남자는 공격적이고 야심적이어야 했으나, 오늘날은 사교적이고 관대해야 한다. 어쨌든 사랑하게 되었다는 느낌은 보통 자신의 교환 가능성의 범위 내에 있는 인간 상품에 대해서만 나타난다. 가령 내가 거래를 하러 나갔다고 하자. 상대는 사회적 가치의 관점에서 바람직해야 하며, 상대자도 나의 명백하거나 숨겨진 재산과 능력을 고려한 다음 나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교화 가치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서로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최상의 대상을 찾아냈다고 느낄 때에만 두 삼은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부동산을 사는 경우에 있어서도 앞으로 개발될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숨겨져 있는 가능성이 거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시장 지향적이고 물질적 성공이 현저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화권에서는 인간의 애정관계도 상품 및 노동시장을 지배하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된다. 

사랑에 대해서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태도에 이르게 하는 세 번째 잘못은,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좀 더 명확하게 말한다면 사랑에 ‘빠져’ 있는 상태를 혼동하는 것이다. 전혀 이해관계 없이 지내 오던 두 사람이 갑자기 그들 사이의 벽을 허물어 버리면서 밀접하게 한 몸이라고 느낄 때, 이러한 일치의 순간은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유쾌하고 격앙된 경험의 순간이다. 특히 폐쇄적이고 동떨어져 있어서 사랑을 모르고 지내던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는 더욱 놀랍고 기적적인 경험이다. 갑자기 친밀해지는 기적은 성적 매력과 성적 결합에 의해서 시작되는 경우 더욱 촉진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두 사람이 친숙해질수록 신선함과 기적적인 면은 점점 줄어들고 마침내 적대감, 실망감, 권태감 등이 생기면서 최초의 흥분의 잔재마저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처음에 그들은 이러한 기미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강렬한 열중, 즉 서로 ‘미쳐 버리는’ 것을 사랑의 열도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던가를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견해-사랑만큼 더 쉬운 것도 없다-는 반대의 경우에 대한 압도적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대한 일반적이 관념으로서 지속되고 있다.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것이 다른 활동의 경우라면, 사람들은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서 개선의 방법을 찾아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경우에 있어서는 포기란 있을 수 없으므로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 것 같다. 즉,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선 인식해야 할 것은 삶이 기술(技術)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배우고 싶다면 우리는 다른 기술, 예컨데 음악이나 그림, 건축, 의학, 공학 따위의 기술을 배우려고 할 때 거쳐야 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어떤 기술을 배울 경우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편의상 기술습득 과정을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이론의 습득이고, 둘째는 실천의 습득이다. 만일, 내가 의학기술을 배우고자 한다면, 나는 먼저 인간의 신체와 여러 가지 질병에 대한 사실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이론적 지식을 모두 배웠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의학기술에 숙달하지는 못했다. 상당한 실무를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의학기술에 숙달하게 되고 마침내 나의 이론적 지식의 결과와 실천의 기술이 일치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의 직관이 모든 기술숙달의 본질이 될 젓이다.

이론과 실천의 습득 이외에도 어떤 기술에 숙달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인이 또 한 가지 있다. 기술 숙달이 궁극적인 관심사로 대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음악에도, 의학에도, 건축에도, 그리고 사랑에도 해당된다. 현대인들이 사랑의 경우 명백하게 실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랑의 기술을 습득하려 하지 않는다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뿌리 깊은 갈망에도 불구하고 사랑 이외의 모든 일―성공, 명예, 돈, 권력 등―을 사랑보다도 더욱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들의 모든 정력이 전적으로 이런 것에 소모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돈이나 권력에 관계되는 것만이 배울 만한 가치가 있다면, ‘오로지’ 영혼에 유익할 뿐 현대적인 의미에서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사랑은 열성적일 필요가 없는 것일까?

3. 사랑은 기술이다.

프롬은 스스로 ‘사랑은 기술인가’라고 묻고는 ‘사랑은 기술’ 이라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사랑이 기술이라면 사랑하기 위하여서는 지식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삶이 기술임과 마찬가지로 ‘사랑이 기술임’을 알아야 하는 일이다.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고, 또 어떻게 사랑을 받아야 하는가를 배울 생각이 있다면 음악가나 건축가, 의사 등의 기술과 같이 어떤 기술을 배우고자 할 때 우선 우리가 해야 할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사랑의 기술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기술의 학습에 있어서도 필수적인 단계가 무엇인가를 프롬은 독자적으로 차분하면서도 소근 거리는 음성으로 기술을 전개해 가고 있다.

‘사랑에 관해서는 어떤 이론도 인간론, 인간 실존론과 아울러 시작해야 한다.’고 전제하고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바는 잃어버린 전인간적(前人間的)인 조화 대신에 그 이성을 발달시켜서 새로운 인간적인 조화를 발견함으로써 전진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생명체’이다. 자신과 민족들을, 자기의 과거를, 자기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이 타자로부터 분리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 자기의 생명이 잠시 동안의 짧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서 자기의 의지와는 어긋나게 죽어야 한다는 사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보다도,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보다도 먼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그가 고독하다는 것, 분리되어 있다는 것, 자연이나 사회의 힘 앞에 무력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 이런 모든 인식은 분리되어 흩어져 있는 인간의 실존을 비참한 감옥으로 만든다.

분리(Separateness)의 경험은 불안을 낳는다. 정말 분리는 모든 불안의 원천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능력을 상실한 채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소망은 분리 상태에서 탈피하여 외로운 감옥을 떠나려는 것이다. 인간―모든 시대의 모든 문화―은 똑같은 문제, 곧 분리 상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어떻게 합쳐지느냐, 어떻게 자신의 개인적인 생명을 초월해서 합일(合一)에 이를 수 있을까하는 문제에 맞닥뜨리고 있다.

프롬은 이와 같은 현대인들의 심리적 갈등의 해소를 위해서는 ‘사랑’의 정신에 기초하여 각자가 사랑으로 결합한다는 것은 각자의 자유를 스스로 이용하여 보다 나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이요, 권위에 굴복하는 것은 새로운 속박에 얽매이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은 귄위에의 복종이 나치스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고 프롬은 주장했다.

사랑은 하나님이 내려 준 천부적인 재능이므로 우리가 느끼는 대로 행동하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안이한 대답을 하기에는 현대의 사회와 인간은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교묘하다. 따라서 사랑의 회복을 위해서는 절실하게 기술이 필요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랑하려고 애쓰면서도, 참으로 나를 주는 사랑을 하고 싶으면서도 이러한 사랑에 실패하게 되는 원인은 바로 기술의 미숙성(未熟性)에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훈련과 인내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점을 날카롭게 파헤친 바로 《사랑의 기술》이다. 목적이 없는 사랑, 다시 말해서 사랑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고 사랑의 기술에 숙달되지 못한 사랑은 오히려 인간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프롬의 경고를 듣고 우리는 사랑의 험난한 길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영화-철학 탐구활동 과제>

☞ 영화 감상 후 QR코드 링크로 영화-철학 심화탐구활동 과제를 제출하세요.

☞ 아래의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으시오.

☞ [질문] 진정한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요? 자신의 생각을 적어 보세요.

☞ 과제 제출 링크  https://forms.gle/tST5QTofziUyZbMe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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