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서전 샘플-박OO

박OO의 자서전.



나는 머리가 나빠서인지는 몰라도 기억력이 굉장히 나쁘다.
그래서 과연 내가 나의 지난날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 진 모른다. 
나는 1984년 3월 24일 오류동에 있는 덕산 병원에서 태어났다. 우리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형 나로 이루어진 네 가족 이였다. 내가 어렸을 적 나는 오류동에서 살았었다. 하지만 내가 유치원에 들어갈 즈음엔 우리 가족은 철산동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래서 나는 철산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내가 유치원에 다닐 적엔 솔직히 말해서 기억이 안 난다. 내가 과연 얼마나 잘 다녔는지도 모른다. 유치원에서 누구를 만났는지도 모르고 단지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께서는 매우 건강 하셨다는 것만이 생각난다. 아무 걱정 없이 일도 잘 풀리셨던 아버지와 우리에게 엄청 잘대해 주셨던 기억만이 남는다. 당시의 아버지께서는 건축가로 하시는 일도 잘 풀리 섰었다. 유치원을 졸업한 나는 광덕 초등학교라는 곳으로 입학하게 된다. 광덕 초등학교 역시 철산동에 있는 초등학교로 형이 다녔던 곳이다. 하지만 나는 광덕 초등학교를 초등학교 2학년 1학기 때까지만 다니게 된다. 이유는 정정하시던 아버지께서 쓰러지신 이유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선천적으로 심장병이 있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심장병이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할 즈음에 매우 심각해 지셨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께선 내가 초등학교2학년에 올라갈 즘에 병원에 입원하시게 된다. 처음 2학년이 됐을 당시 아버지께서는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고 어머니는 병간호를 하시느라 매일 아침을 병원으로 출발하셔야만 했다. 아직 어리던 우리 형제는 아버지의 병이 심각하다고 까지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만, 그 당시 우리는 저녁때까지 엄마가 돌아오시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던 기억만이 남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도 무척이나 힘드셨을 것이다. 어린 아들들을 재우고, 그 먼 병원까지 왔다 갔다 하셔야만 했으니 말이다. 병원에 있으실 땐 우리들 걱정에, 집에 있으실 땐 아버지 걱정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도달 하셨을 것이다. 결국 어머니는 우리 형제를 이모 댁에 맡기게 되었고 당신은 병원으로 들어가시게 되었다. 우리가 이모 댁에 들어갔을 때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시작할 무렵이었다. 결국 이 모집에서 지내게된 우리들은 학교도 전학을 가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 형제는 2학기가 시작할 무렵에 개봉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내 어릴 시절 모든 기억은 초등학교 2학년 생활이후로 기억이 남는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그 당시 전학을 해야만 했던 게 너무나 싫었다. 그 당시 친한 친구들과 헤어져야만 했던 거도 싫었다. 
광덕 초등학교를 나오면서 버스 타고 오는 길에 울었던 것만이 기억에 선명히 남는다. 내성 격도 이때 많이 바뀌었던 거 같다. 어렸을 적 나는 매우 당당한 모습으로 지냈었다. 어린것이 멀 알겠냐 만은..아무튼 이모 댁에서 살면서 또 학교를 옮기는 과정에서 나는 내 성격이 많이 내성적으로 바뀌었다고 본다. 무슨 일을 해도 자신감이 없는 그런 모습… 
우리 형제가 이모 댁에서 생활하기 시작했을 무렵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고 있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 수록 어렸던 우리 형제는 이모 댁에서 생활하는데 눈치를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눈치란 것을 알게된 우리 형제는 하나하나 작은 일에도 조심스럽게 티를 안내에게 할 수밖에 없었고 최대한 조용히 지내도록 노력했었다. 그런 생활이 계속 됐던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그건 바로 아버지께서 퇴원을 하시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께선 퇴원을 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형제와 친척 누나를 데리고 놀이 동산에 가셨다. 그때 아버지께선 최대한 밝은 얼굴로 우리를 재밌게 해 주시려고 무척이나 노력 하셨던 거 같다. 그대까지만 해도 어린 나는 몰랐다. 아버지께서 무척이나 무리 하셨다는 것을, 다만 아버지께선 다 낳으신 줄로만 알고 있었다. 전혀 그렇지 않으셨는데…… 
아버지께선 퇴원을 거의 억지로 하셨다고 한다. 단지 우리들을 보기 위해서 어린 아들들과 놀아주기 위해서 무리를 하면서 까지 억지로 퇴원을 하신 거라 한다. 아마도 아버지께선 그것을 우리들과의 마지막 여행이라고 생각 하셨을 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서야 안 것이지만 그때의 난 전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날 우리 가족은 놀이 동산에 끝까지 있지 못했다. 아버지의 병이 위독해 지셔서 중간에 돌아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난 일찍 돌아간다고 아버지께 투정을 부렸다. 아버지의 사정도 모르면서………. 
아버지도 슬프셨을 것이다. 작은아들이 그렇게 원하는 데도 당신 때문에 못해주던 아버지도 슬프셨을 것이다. 그렇게 아프셨던 아버진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우리 앞에선 전혀 아프신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저 웃음으로만 우리를 대해 주신 것이다. 당신은 그렇게 힘들고 아프셨는데도…… 
그렇게 아버지의 퇴원은 끝났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아버지와 함께 한 마지막 여행이었던 것 같다. 이제 와서 느끼는 거지만 그 때 투정을 부렸던 내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럽게 느껴진다. 그렇게 2학년을 보내고 3학년이 됐을 때 우리는 개봉동으로 완전히 이사를 오게 되고 우리형제는 할머니께서 맡으시다가 친척누나가 돌봐주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 집에서 사는 게 편했던 거 같다. 내가 3학년 1학기를 보냈을 무렵 아버지께선 돌아가시게 된다. 그래서 어머니는 병원을 나오시게 되고 우리가족 3명이 뭉쳐서 살게 된다. 내가 5학년이 됐을 때 아버지께서 병원에 들어가시기 전부터 지으셨던 집으로 이사를 다시 한번 가게 된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이 내가 현재에 살고 있는 집이다. 아버지께서는 병원에서도 전화로 이 건물을 지으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마지막 작품과도 같은 집…………. 
내가 6학년에 올라갔을 때 나는 서명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지금까지도 지내고 있는 너무나 소중한 친구들. 정말 내 마음까지도 보여줄 수 있는 친구들. 그 녀석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데에 난 너무나 감사한다.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 나는 별다른 큰 일은 없었다. 
개봉초등하교를 졸업하고 개웅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아! 한가지 일이 있다면 내가 중3때 처음으로 반장을 했다는 것이다. 월 반장 같은 건 해봤어도 투표로 해서 반장이 된 거는 처음 이었다. 그 당시 반장하기가 너무나 싫어서 내가 애들에게 한말은 “날 뽑으면 우리 반 망한다!!” 이었다. 그것도 큰소리로. 물론 담임선생님도 웃고 다른 애 들도 웃었었다. 이렇게 하면 안 뽑히겠지 하고 생각했던 나는 내생각과는 달리 반장을 하게 되어 버렸다. 나는 반장이 되고 나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반장을 하게 되어서 반친구들 과도 빨리 사귈 수 있었다. 반장이란 정말 한번쯤은 해볼 만 한일 일거 같다. 3학년이 지나고 나는 무사히 개웅 중학교를 졸업한다. 
그리고 현재 우신 고 2학년에 재학 중이다. 지금에 와서 나의 과거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릴 적 우리 형제를 맡아주고 길러준 이모 댁에 정말 감사한다. 이모 댁에서 우리를 맡아 주셨기에 어머니도 그나마 마음을 놓으 시게 되었고 우리들도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진심으로 이모 님께 우리 형제는 감사했다고 말을 전하고 싶다. 아직까지 한번도 감사하다고 말을 한적히 없는 우리지만 마음속으론 언제나 이모 님께 감사했다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한다. 이젠 나도 앞날을 걱정할 때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고민 해봐야 하고 나의 진로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하루 하루를 너무 무의미하게 보낸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를 보내고 나면 너무 후회되는 그런 나날들………
시간은 앞으로도 쉼 없이 흘러갈 것이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 시간을 돌리고 싶다고 후회를 하지 않도록 나는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소중한 시간만큼은 지키면서 소중하게 내 미래를 개척해 나갈 것이다. 다시는 하루를 후회하지 않고 내가 오늘을 보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는 그런 날들이 오도록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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